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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고추가 아니면 고추찜을 못 만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친정 어머니 옥상에서 청양고추가 감당이 안 될 만큼 쏟아지고 나서야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이걸 '고추 무르미'라고 부릅니다. 어릴 때는 거들떠도 안 봤던 반찬인데, 직접 만들어 먹어보니 밥 한 그릇이 사라지더군요.
옥상 고추밭, 감당이 안 될 만큼 열렸습니다
친정 어머니 댁 옥상은 그늘 한 점 없이 햇볕이 정면으로 내리꽂히는 곳입니다. 고추 대가 딱 열 대밖에 안 되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청양고추 일곱 대, 일반 오이고추 세 대가 자라고 있습니다. 일주일만 따지 않고 두면 정말 놀랄 정도로 열려있습니다. 저번 주에 그냥 뒀다가 다음 주에 갔더니 이미 여러 군데 나눠주고도 한참 남는 양이었습니다.
고추장아찌도 담그고, 여기저기 나눠드리고, 그래도 또 남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고추무르미였습니다. 경상도 방언으로 '무르미'란 재료에 밀가루나 전분을 입혀 쪄낸 뒤 양념에 버무리는 조리법을 말합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고추찜, 고추무침이라고도 부르지만 저는 어머니한테 배운 이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이런 소박한 반찬이 왜 밥상에 올라오는지 이해를 못 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만들어서 밥 한 술 얹어 먹어보니, '아, 이게 이런 맛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쫀득한 식감의 비법, 물 스프레이 한 번에 달렸습니다
고추 무르미를 만들 때 대부분 밀가루만 묻혀서 쪄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써봤는데, 거기서 딱 한 가지 과정을 빠뜨리면 식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바로 찜기 안에서 중간에 물을 뿌려주는 단계입니다.
원리를 이해하면 왜 이 과정이 중요한지 금방 납득이 됩니다. 호화(糊化, gelatinization)가 핵심입니다. 호화란 전분 입자가 충분한 수분과 열을 만나 팽창하면서 쫀득하고 투명한 상태로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찜기 안의 수증기만으로는 이 호화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스프레이로 직접 물을 뿌려줘야 밀가루와 감자전분이 제대로 쫀득쫀득해집니다. 제 경험상 이 단계를 빠뜨리면 밀가루가 뿌옇게 겉도는 느낌이 납니다.
감자전분을 밀가루에 섞어 쓰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감자전분(potato starch)이란 감자에서 추출한 전분으로, 일반 밀가루보다 팽창력이 강해 씹을 때 더 탄력 있는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고추에 밑간을 먼저 한 뒤 밀가루 세 스푼, 감자전분 한 스푼 비율로 묻혀주면 됩니다. 찜기에 올린 뒤 물이 끓기 시작하면 5분, 3분 30초가 지났을 때 스프레이로 물을 고루 뿌리고 뚜껑을 닫아 나머지 1분 30초를 마저 찝니다. 찐 직후에는 미니 선풍기 같은 바람으로 살짝 식혀주면 겉이 꼬들꼬들해집니다.
또 한 가지, 저는 꽈리고추가 아닌 청양고추나 오이고추로 만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꽈리고추는 쭈글쭈글한 표면 덕분에 양념이 잘 달라붙는다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굳이 꽈리고추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청양고추로 만들면 맵기 때문에 그냥 밥 한 숟갈이 절로 넘어갑니다.
- 밑간(꽃소금 반 스푼) → 밀가루·감자전분 코팅 → 찜기 5분
- 3분 30초 경과 후 물 스프레이 분사 → 뚜껑 닫고 1분 30초 추가 가열
- 완성 후 선풍기 바람으로 5분 식혀 겉면 꼬들꼬들하게 마무리
- 꽈리고추 외 청양고추·오이고추 모두 사용 가능
양념장 한 그릇에 담긴 계산, 참기름과 국간장이 전부입니다
고추무르미 양념장은 사실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참기름과 국간장(진간장)입니다. 이 두 가지의 비율만 잘 잡으면 나머지는 기호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국간장 두 스푼을 기준으로 참기름 한 스푼을 맞추는 비율이 가장 깔끔한 맛을 냅니다.
여기에 까나리 액젓이 들어가면 감칠맛이 확 올라옵니다. 감칠맛의 정체는 글루탐산(glutamic acid)입니다. 글루탐산이란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발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혀에서 '깊은 맛'으로 느껴지는 성분입니다. 까나리 액젓에 이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있어서 양념장에 단 한 스푼만 넣어도 전체 맛이 달라집니다. 설탕 대신 벌꿀을 넣으면 단맛이 부드럽게 퍼집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설탕을 썼을 때보다 뒷맛이 훨씬 덜 텁텁합니다.
고추 자체가 가진 영양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캡사이신(capsaicin)은 항산화 작용과 신진대사 촉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캡사이신이란 고추 씨앗 주변에 집중된 화합물로, 열에 분해되지 않아 익힌 고추에도 그대로 남습니다. 또한 고추에는 비타민 C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식품성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청양고추 100g에는 비타민 C가 약 72mg 함유되어 있습니다(출처: 농촌진흥청). 매운 것이 조금 부담스럽다면 오이고추를 섞어서 쓰면 됩니다. 저처럼 매운맛에 약한 편이라면 청양고추와 오이고추를 반반 섞어 만드는 방법이 현실적입니다.
한국의 고추 소비와 관련해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연간 건고추 생산량은 수만 톤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추는 한국인의 식탁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채소 중 하나입니다(출처: 농림축산식품부). 그 오랜 식문화 안에 고추무르미 같은 소박한 레시피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꽈리고추 말고 청양고추나 일반 고추로도 만들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꽈리고추는 표면이 쭈글쭈글해서 양념이 잘 달라붙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친정 어머니 텃밭에서 따온 청양고추와 오이고추로 자주 만듭니다. 청양고추로 만들면 매운맛이 강해서 밥도둑이 따로 없습니다. 매운 것이 부담스럽다면 오이고추를 반반 섞는 방법이 좋습니다.
Q. 찔 때 물 스프레이를 꼭 써야 하나요? 그냥 쪄도 되지 않나요?
A. 스프레이 없이 그냥 쪄도 먹을 수는 있지만, 식감이 확연히 다릅니다. 수증기만으로는 밀가루와 감자전분의 호화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아서 밀가루가 겉돌고 뿌연 느낌이 납니다. 제가 직접 두 가지를 비교해봤는데, 중간에 물을 뿌린 쪽이 훨씬 쫀득하고 윤기도 납니다. 이 단계가 이 요리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만듭니다.
Q. 감자전분이 없으면 밀가루만 써도 되나요?
A. 밀가루만 써도 기본적인 고추무르미는 됩니다. 다만 감자전분을 조금 섞으면 씹었을 때 탄력이 확실히 살아납니다. 감자전분이 없다면 옥수수전분(콘스타치)으로 대체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밀가루 3 : 감자전분 1 비율이 가장 균형 잡힌 식감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Q. 양념장에 설탕 대신 벌꿀을 쓰는 이유가 있나요?
A. 단맛을 내는 역할은 같지만 뒷맛이 다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설탕은 단맛이 직선적으로 치고 빠지는 반면 벌꿀은 은은하게 퍼지면서 뒷맛이 덜 텁텁합니다. 소화 효소와 아미노산이 함께 들어있어서 양념 전체의 맛이 좀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같습니다. 없으면 물론 설탕이나 매실청으로 대체해도 됩니다.
결론
고추무르미는 재료가 넘칠 때 생각나는 반찬이 아니라, 한 번 제대로 만들어두면 계속 생각나는 반찬이었습니다. 물 스프레이 한 번의 차이가 식감 전체를 바꾼다는 걸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이 요리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 여쭤보고 따라 만들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텃밭 고추를 따오면 제일 먼저 이 요리부터 생각납니다.
꽈리고추가 없어도, 청양고추나 오이고추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참기름과 국간장 비율만 잡아두면 나머지는 냉장고 상황에 맞게 조절하면 됩니다. 다음번에 고추가 많이 생기면 꼭 한 번 만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예전에는 왜 이 반찬이 밥상에 올라왔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